이제 다시
표가 이제는 필요치 않은 이들,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던 이들은 참석 하진 않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었는데, 그들에겐 그 자리를 지키기엔 버거웠던 모양이다.
"나와 DJ가 목숨을 걸고 얻어내고 지켜낸 민주주의를 위해 과연 너희들은 무엇을 했는가?",
"내가 정치생명을 걸고 추진한 역사 바로세우기가 이대로 후퇴하여 70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랬다.
여야, 가졌던 자 & 가진자 & 가지려는 자 그리고, 이들을 지켜보는 자 모두에게 떨어지는 불똥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비처럼 눈이 내려온다.
거부한 자들을 뺀 남겨진 이들에게, 꾸짖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보여주는 차별없는 울음이며, 깨우침이다.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통한 금융실명제는 깨끗한 정치문화를,
하나회 숙청등 과거 군부세력들의 정계진출 및 권력확장을 봉쇄하고,
시대의 아픔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를 통한 그의 올바른 역사 바로세우기와 민주화를 위한 그의 개혁정책등은
'대통령이라서 가능한 게 아니라 YS가 대통령이 되었기에 가능했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 가는 그런 계절이 왔다.
어떤 이는 싫어하고, 어떤 이는 즐거워 하는 그런 계절이 시작되었다.
다른 이들에겐 새로운 대권을 향한 첫 발이 시작되는 듯하다.
그가 가지고 있던 표들을 향한 뜨거운 구애는 추위도 어쩔 수 없었고, 종편들도 동조하는 듯 하다.
정치적 동지가 약한 그들은 DJ, YS, 노짱의 계보를 이를 큰정치인으로 우뚝 설 기회를 오늘 영결식에서 '출근도장찍기'로 시작하는 듯 했다.
YS의 정치적 아들이라는 이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어떨 지 궁금해진다.
이제 그녀와 반대의 길을 걸어 홀로서기를 다시 모색해 볼 것인가?
또 다른 이는 집권세력들의 흔한 '대권' 다른 인물세우기로 분열조장에 휩쓸리지 않을 리더십과 지도력이 더 필요해 보이는 하루였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시대가 있다.
생명이 태어나고, 이루어 성숙되고(grow up), 지는(sink down) 순간에도 같이 살아가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그 범주에 속해지기도 한다.
나를 기준으로 해서 할아버지뻘에서 손자뻘까지 그 폭의 넓이는 깊고 넓을 수도 있다.
나가 모여 가족이 되고, 우리가 되고, 집단이 되고, 나라가 되어 질 때
내가 나일때의 나와, 너와 내가 모여 가족과 집단이 되고, 나라가 되었을 때,
내가 나 일때의 나는 혼자서도 잘 하는 사람인가?
내가 너와 하나일때 비로서 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인가?
너와 내가 만든 우리가 너로 인한 나로 되어 질 때 나는 나 혼자로서의 나로 있어지는 가?
그런 나들이 모여 모여서 살아가는 시간이 시대가 되고, 역사가 된다.
내가 당사자 일때와 방관자 일때의 삶은 같을 수 있을 까?
우리는 이미 과거인 것을 현재로 인식하게 되는 데, 이는 뇌의 전달속도가 제한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연속성을 인지하고 있다고 보는게 옳다.
어떤 계기로 인한 인식의 변화는 때때로 우리가 미래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부정하게 만든다.
이는 학습에 의한 기억일 지 모른다.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것은 글이며, 그 다음은 그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 글로써 선동하고, 인도하고, 지도하는 많은 부류의 인과관계는 많고 적음의 문제과 깊고 넓음의 문제로 제한 되어서는 안된다.
인식이 만들어 낸 가치는 개개인의 독립적인 사건들과 인과적 순서에 알맞게 배치해 나가야 하는 데, 일치하지 않는 것들 투성이기 때문에 주관성을 배제해야 함이 옳다.
판단은 그 다음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록되어지는 마치 시계의 시간과 같이 정립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주는 잣대는 다각화의 관점에서 판단 하는 즉, 감정이 실리지 않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힘들거나 두려움을 느낄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면 시간이 총알처럼 빨리 지나감을 느낀다.
힘들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 느끼는 감정, 주위의 변화를 눈치 챌 수 있거나 없는 경우등의 감각들은 객관적이기 보다는 주관적인 판단이 우선시 되기 때문에 간혹 오류를 범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역사로 남겨질 수 있다.
현실인식에서 즉,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혹은 신체의 변화에 따라 인물들의 평가하는 기준은 다르게 바뀐다.
시대를 군림했던 절대자들이 그러했고, 또 그렇게 바뀌어 갔다.
정당성이 이미 확보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결국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죽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이고, 죽은 후에는 본인 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니 자기 만족, 자기당착, 자위 오르가즘을 느끼려는 것이었을까?
이론만 가지고 하지 말고, 하려거든 너 자신을 돌아보고 하라.
'비판하려는 자 정점을 찍고 나서 하라. '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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